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당연시하던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나도 2년 전에 그랬었다. 교회 구매에 있어서 한 동역자로부터 매일마다 공격을 받자,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리고 한 달 만에 급성 류마티스가 걸려서 전신마비에 걸린 사람처럼 집에서 6개월을 누워 있었다. 내 손으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일상에서 아무것도 없었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이 들자, 정신적으로도 약해지게 되었다. 오래된 병에 효자 없다더니, 나를 돕던 남편도 인내의 한계를 느끼며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류머티즘으로 30년을 고생한 한 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류머티즘은가장 고통스러운 3대 질병의 하나라고 했다. 그 이름에 걸맞게 모든 관절 마디마디가 무엇에 닿거나 스치기만 해도 아팠다. 침대에 누워 있어서 등이 아프고 뒤척이면 더 아팠다. 당연히 살 소망도 사라졌다. 지난지난 30여 년의 태국에서의 나의 삶을 뒤돌아보니,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등 떠밀려 이곳에 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살아왔다는 생각에 감사했고, 그래서 그 당시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 같았다. 이와 같이눈만 뜨면 부정적인 생각을 하니, 류머티즘으로온몸이 부어 있는데다가 얼굴까지 운명주의의 어두움이 깊이 드리워져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어둡고 흉하고 비참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서울에서 큰 딸이 아빠의 환갑을 축하하러 왔다가 나의 기가 막힌 모습을 보면서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get well soon 카드를 남기며 엄마는 꼭 나을 거라는 희망을 주고 떠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 카드를 매일매일 보면서 희망을 읽었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태국에서 치료받던 모든 것을 중단했다. 사실, 치료비도 비쌌지만, 류머티즘의사들이 임상 경험이 없어서 나를 임상 대상자로 실험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가서 치료를 받으려면 6시간의 비행기를 타야 되는데, 내가 과연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가 관건이었다. 그 당시 내 무릎 관절은 너무나 뻣뻣해서 구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어려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오직 낫고자 하는 한 마음으로 휠체어 서비스를 받으면서 임상 경험이 풍부한 류머티즘의명의와 주기적인 만남으로 치료가 이루어졌다.
어느 날, 나의나의 두 다리는 튼튼해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고, 나의 손목은 부드러워 돌릴수 있고 손가락 붓기도 빠져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병을 이겨낸 나 자신이 너무나 대견하였고,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그날부터 하나하나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행복이 내게 넘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게 속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깊이 느끼며 순간순간을 감사하며 즐기게 되었다. 지금은 올 크리스마스에 차르다시 연주를 목표 삼고 연습에 매진 중이다. 또한 건강은 건강할 때 잘 관리하고 지켜야 함을 체험적으로 배우면서,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서 열심히 운동도 하고 있다.